미국 관세 15%…조선 500년 기록에 「관세」는 0번이었다 (본편)
숫자로 먼저
| 항목 | 값 |
|---|---|
| 실록의 「신문고」 | 48건 |
| 上言 3,233건 · 訴冤 511건 · 擊錚 | 285건 |
| 민원 4,944건 · 청원 4,426건 · 집회 | 2,904건 |
유명한 북, 48건

억울한 백성이 북을 치면 임금이 들어 준다. 신문고입니다. 교과서에 나오고, 조선의 열린 정치를 말할 때 늘 함께 나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신문고가 나오는 기사는 48건입니다.
500년 동안 48건입니다. 왜 이렇게 적을까요.
북을 세운 날

1401년, 태종이 북을 세웁니다. 처음 이름은 등문고였고 곧 신문고로 고칩니다.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이 원통함을 품었는데 관청이 받아 주지 않으면 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겨울, 신하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신문고를 만든 것은 좋으나 무고로 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문이었다

이듬해 교서에 절차가 적힙니다. 억울한 일은 먼저 담당 관청에 냅니다. 지방이면 수령과 감사에게 냅니다. 그래도 처리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내고, 사헌부가 처리하지 않으면 그때 와서 북을 칩니다.
그리고 한 줄이 더 있습니다. 절차를 건너뛰고 온 자도 법에 따라 벌한다.
북은 마지막 문이었습니다. 앞의 문을 다 두드린 것을 보여야 열렸습니다. 48건이라는 숫자는 억울한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여기까지 온 사람이 적어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쓴 길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임금께 글을 올린 상언이 3,233건입니다. 원통함을 호소한 기사가 511건, 징을 쳐서 호소한 격쟁이 285건입니다.
격쟁은 임금이 지나는 길가에서 징을 쳐 행차를 멈추게 하는 방식입니다. 절차를 밟는 대신 직접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북은 48건, 글은 3,233건. 제도로 만든 문보다 직접 올린 글이 예순 배 넘게 많았습니다.
길을 열자 몰렸고

1468년의 기록입니다. 백성이 관리의 불법을 고발할 수 있게 하자 실제로 고발이 쏟아집니다. 어떤 이는 백악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징을 쳤습니다.
그러자 실록은 이렇게 적습니다. 임금이 자못 싫어하여 마침내 그 글을 태우라 명하고 다시 조사하지 않았다.
길을 열자 사람이 몰렸고, 몰리자 길을 닫았습니다.
그 문은 지금도 서 있습니다

격쟁이 벌어지던 곳은 임금이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궁궐 문 앞의 그 길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이 모입니다.
만드는 일과 열어 두는 일
지금 국회 기록에는 민원이 4,944건, 청원이 4,426건, 집회가 2,904건 남아 있습니다. 국민청원을 직접 언급한 것은 169건이었습니다.
조선의 상언 3,233건과 격쟁 285건 옆에 놓으면 비율이 닮았습니다. 글로 올리는 쪽이 여전히 많고, 직접 나서는 쪽이 그 다음입니다.
신문고는 이름이 남았고 상언은 이름이 없습니다. 기억되는 제도와 실제로 쓰인 통로가 달랐다는 뜻입니다.
문을 만드는 일과 그 문을 열어 두는 일 사이에, 조선은 48건과 3,233건이라는 거리를 남겼습니다.
숫자로 본 한국사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북을 세운 날,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01년, 태종이 북을 세웁니다.
마지막 문이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48건이라는 숫자는 억울한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여기까지 온 사람이 적어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쓴 길,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임금께 글을 올린 상언이 3,233건입니다. 원통함을 호소한 기사가 511건, 징을 쳐서 호소한 격쟁이 285건입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세조실록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