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빌고, 같은 해에 비를 멈춰 달라 빌었다 — 조선에 67번
숫자로 먼저
| 항목 | 값 |
|---|---|
| 기우제 1,570건 · 기청제 | 161건 |
| 한 해에 둘 다 지낸 해 — | 67번 |
| 기우제 1,570 : 기청제 | 161 |
| 비를 빈 해 305년 · 비를 멈춰 달라 빈 해 | 104년 |
| 1670년 — 기우제 10건 · 기청제 | 1건 |
여는 숫자

가뭄 끝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조선의 기록에도 같은 해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를 비는 제사, 기우제를 적은 기사는 천오백일흔 건입니다. 비가 그치기를 비는 제사, 기청제는 백예순한 건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한 해에 모두 지낸 해가 예순일곱 번 있었습니다.
어떻게 세었나

센 방법을 먼저 밝힙니다. 실록 원문 파일을 한 줄씩 다 읽었습니다. 표본이 아닙니다.
기우제는 기우, 기청제는 기청. 이 두 글자가 본문에 나온 기사를 연도별로 세어 겹치는 해를 찾았습니다. 같은 시대를 두 번 쓴 판본이 다섯 쌍 있어, 정본만 남기고 삼십사만 팔천구백스물다섯 기사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비는 늘 모자랐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숫자의 차이입니다. 비를 빈 기록이 비를 멈춰 달라 빈 기록보다 열 배 가까이 많습니다.
기우제를 지낸 해는 삼백다섯 해, 기청제를 지낸 해는 백네 해입니다. 조선 오백 년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해에 조정이 하늘에 비를 빌었다는 뜻입니다.
1547년, 타 버린 땅에 쏟아진 비

한 해 안에서 이것이 어떻게 뒤집히는지, 천오백사십칠년 명종 이년의 기록이 보여 줍니다.
그해 삼월, 임금은 해와 달의 빛을 보니 가뭄의 조짐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하는 이렇게 아룁니다. 물과 불은 지천으로 흔한 것인데, 마을의 우물이 말랐습니다. 삼월 스무이레, 조정은 경기도에 향과 축문을 내려 비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유월, 같은 임금의 말이 이렇게 바뀝니다. 올해 가뭄이 너무 심해 땅이 타 붉은 땅이 되었는데, 이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한 달이 다 가도록 그치지 않아 곡식을 더 해친다.
떠내려간 것들

이틀 뒤 충청 감사의 보고가 올라옵니다. 청주 남문 밖 냇물이 넘쳐 성안 인가가 거의 물에 잠겼고, 돌다리 서른여 칸이 무너졌으며, 민가 열여섯 채가 떠내려갔습니다.
열흘 뒤에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옵니다. 안동의 영호루가 떠내려갔고, 고려의 공민왕이 쓴 현판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해 조정은 기우제 여섯 건, 기청제 두 건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봄에는 비를 빌고, 여름에는 비를 멈춰 달라 빈 것입니다.
1670년, 그 다음에 온 것

같은 일이 백이십삼년 뒤에도 일어납니다. 천육백칠십년, 현종 십일년입니다.
삼월에 예조가 가뭄을 이유로 기우제를 청합니다. 유월에는 경상도의 수재가 심하다는 보고가, 같은 달 경기도의 수재가 참혹하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그해 기우제는 열 건, 기청제는 한 건이었습니다.
이 해가 경신대기근이 시작된 해입니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그 흉년으로 조선은 큰 인명 피해를 겪었습니다. 가뭄과 홍수는 따로 온 재난이 아니라, 한 해 안에서 이어진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숫자가 말하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이 숫자의 한계를 밝힙니다.
세기별로 나눠 보면 홍수 기록의 밀도는 기사 만 건당 스물둘에서 마흔 사이입니다. 편차가 크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물난리는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사 수는 재해가 얼마나 컸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조정에 보고되어 사관의 붓에 닿은 횟수입니다. 십구세기에 기록이 줄어드는 것도 재해가 줄어서가 아니라 실록 자체가 얇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숫자들은 조선의 날씨가 아니라, 조선이 날씨를 적는 방식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어떤 글자로 셌는지는 설명란에 적어 두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어떻게 세었나
센 방법을 먼저 밝힙니다. 실록 원문 파일을 한 줄씩 다 읽었습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