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폭등…2,700년간 나라가 연 것은 곳간이었다
한눈에 — 1,623년 9월, 호조가 보고합니다. 2,007백 년치 기록에서 쌀값이나 곡식값을 논한 기사는 백일흔한 건입니다.
숫자로 먼저
| 항목 | 값 |
|---|---|
| 최근 두 대 국회 — 쌀값·농산물 가격 | 1,204건 |
| 비축미·정부양곡 | 194건 |
| 국회 — 값 1,204건 · 나눠 줌 | 194건 |
| 옛 기록은 값 171건 · 나눠 줌 | 1,801건 |
오늘

장바구니 물가가 뛰었습니다. 값이 오르면 우리는 값을 이야기합니다.
최근 두 대의 국회 회의록을 세어 보면 쌀값과 농산물 가격을 말한 발언이 천이백네 건, 비축미나 정부양곡을 말한 발언이 백아흔네 건입니다. 값 이야기가 여섯 배 많습니다.
옛날에는 어땠을까요. 정확히 반대였습니다.
그때도 값은 뛰었다

卽今海邊米價 一匹直十斗 而京中則不過二斗
— 지금 해변의 쌀값은 무명 한 필에 열 말인데
*인조실록 · 인조 1년 9월 15일 · wpa_10109015_001*
1,623년 9월, 호조가 보고합니다. 올해 농사는 지역마다 다른데, 물난리를 겪은 곳을 빼면 대체로 잘 여물었습니다. 지금 바닷가에서는 무명 한 필로 쌀 열 말을 살 수 있는데, 서울에서는 두 말밖에 못 삽니다.
같은 무명 한 필로 사는 쌀이 다섯 배 차이가 납니다. 지금으로 치면 지역별 물가 격차입니다.
그런데 호조가 청한 것은 서울 쌀값을 내리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관리 두 사람을 내려보내 시월 안에 바닷가에서 쌀을 사 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값보다 곡식

2,007백 년치 기록에서 쌀값이나 곡식값을 논한 기사는 백일흔한 건입니다. 반면 곡식을 나눠 준 기록은 천팔백한 건입니다. 열 배가 넘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값 두 건에 나눠 준 기록 스물여섯 건, 고려는 두 건에 여든일곱 건, 조선은 백마흔다섯 건에 천육백스물일곱 건입니다.
어느 시대를 봐도 나라가 남긴 것은 값이 아니라 창고였습니다.
그때의 결정

命賑飢民 國之有倉廩 爲民也
—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라 명하였다
*태종실록 · 태종 10년 6월 12일 · wca_11006012_001*
1,410년 유월, 태종이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풀라 명합니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신하에게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나라에 창고가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값을 잡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창고를 열겠다는 말입니다. 조선의 물가 대책은 이 한 문장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別設賑恤裁省句管堂上 以許積 洪命夏 趙復陽爲之
— 진휼과 재정 절감을 함께 맡는 자리를 따로 두고
*현종실록 · 현종 1년 9월 21일 · wra_10109021_003*
1,660년 9월, 현종이 즉위한 첫해입니다. 조정은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일과 나라 살림을 줄이는 일을 함께 맡는 자리를 새로 만들고 세 사람을 앉힙니다.
먹일 곡식을 마련하는 일과 쓸 곳을 줄이는 일이 한 묶음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10년 뒤 1,670년, 경신대기근이 시작됩니다. 현종 대의 구휼 기록이 유난히 촘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창고를 여는 것으로 버텼지만, 그 창고도 바닥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뒤집혔다

이제 오늘의 기록을 같은 방식으로 놓아 봅니다.
옛 기록에서는 나눠 준 이야기가 값 이야기보다 열 배 많았습니다. 지금 국회에서는 값 이야기가 여섯 배 많습니다.
정확히 뒤집혔습니다. 나라가 물가를 다루는 방식이 창고에서 값으로 옮겨 온 셈입니다.
같이 생각해 봅니다
다만 곧바로 견주기 전에 짚을 것이 있습니다.
조선의 창고는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흉년에 되돌려 주는 9조였습니다. 시장에서 값이 정해지는 지금과는 작동 방식이 다릅니다. 지금 국회가 값을 더 말한다고 곡식을 다루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비축미와 정부양곡을 말한 발언도 백아흔네 건 있습니다.
그래도 남는 물음이 있습니다. 값이 오를 때 값을 볼 것인가, 곳간을 볼 것인가.
태종은 나라에 창고가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창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답은 여기서 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사에서 배운다 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