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덮었다…정승 둘이 파직됐지만 열흘 만에 돌아왔다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다음 날 죽었다 | 세종실록 · 1427년 6월 21일 |
| 열흘도 안 되어 돌아왔다 | 세종실록 · 1427년 7월 15일 |
다음 날 죽었다

끝난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말이 요즘 오갑니다. 육백 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1427년, 충청도 신창현. 고을 관청에서 일하던 표운평이라는 사람이 매를 맞고 다음 날 죽었습니다.
사람 하나가 죽은 이 일로, 좌의정과 우의정이 나란히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취한 척한다고 여겼다

서달이라는 사람이 길을 가다, 고을 아전이 예를 갖추지 않자 화가 나서 종들을 시켜 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표운평이 한마디 했습니다. 원님도 없는 때에 관리를 이렇게 묶어 때리느냐.
종들이 그를 때려 끌고 오자 표운평은 정신이 아득해 말을 못 했습니다. 서달은 그것을 취한 척하는 것으로 여기고, 쉰 대를 더 때렸습니다.
처음엔 제대로 적혔다

유족이 관찰사에게 호소했고, 관찰사는 두 수령을 보내 조사하게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제대로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달이 시켜서 때린 것이라고 조서를 갖춰 보고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서달이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사위인지 알려지면서부터입니다.
외아들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

서달의 아버지는 형조판서였습니다. 오늘로 치면 법무를 맡은 우두머리입니다. 그리고 서달은 좌의정 황희의 사위였습니다.
아버지는 조사하던 수령들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외아들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
사건이 난 고을은 마침 우의정 맹사성의 고향이었습니다.
길목에서 가로챘다

그리고 문서가 사라집니다.
신창현감이 알렸습니다. 차사관이 보고 문서를 가지고 갈 것이다.
그러자 서달의 매부였던 이웃 고을 수령이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그 문서를 가로챘습니다. 조사 결과가 올라가기 전에 중간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다음은 유족이었습니다. 친척뻘 되는 사람이 이익으로 꾀었고, 죽은 사람의 형은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재상과 수령이 시키는 일인데 따르지 않으면 끝내 어디에 몸을 두겠느냐.
마침내 합의서를 써서, 죽은 사람의 아내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다시 봐도 똑같았다
합의서가 들어오자 조사관들은 증인을 다시 모아 진술을 뒤집었습니다. 서달은 빠지고, 죄는 종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관찰사가 미심쩍어 다른 두 수령에게 재조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청탁을 받았습니다. 실록은 한 줄로 적었습니다. 전에 만든 안건 그대로 보고하였다.
형조로 올라간 뒤에는 일곱 달이 그냥 흘렀습니다.
열흘도 안 되어 돌아왔다
마지막에 걸린 것은 임금이었습니다. 세종은 조서를 읽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데를 발견하고, 의금부로 내려 다시 캐게 했습니다.
그러자 전부 드러났습니다.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파직됐고,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은 관원까지 모두 열둘이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정승은 열흘도 안 되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때려 죽인 서달은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했습니다.
덮은 사람들은 벌을 받았고, 죽인 사람은 살았습니다. 실록은 그것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다음 날 죽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27년, 충청도 신창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