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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팔면 얼마나 벌까 — 이완용 600억 정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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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된 기록

대목출전
도입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1일
영어 잘하는 수재매천야록 권3 · 광무 4년
칼 세 번통감부 전보 제44호 · 1909년 12월 22일
도장 하나, 백작 하나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정산서 첫 줄 — 은사공채 15만 원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정산서 첫 줄 — 은사공채 15만 원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2월 27일
진짜 돈은 땅이었다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 2010
포도주 한 다스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2일

이 대본의 원칙

과장하지 않는다. 제목은 자극적이어도 본문은 기록만 말한다. 금액 환산은 근거(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당시 물가)를 화면에 밝힌다.

모든 인용은 parsed/ 원문에서 가져왔고 기사 ID를 붙였다. 화면에 원문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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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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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赤葡萄酒一打于侯爵李完用。 以其病危篤也。

— 후작 이완용에게 적포도주 한 다스를 하사하다. 병이 위독하기 때문이다.

*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1일*

賜赤葡萄酒一打于侯爵李完用。 以其病危篤也。

— 후작 이완용에게 적포도주 한 다스를 하사하다. 병이 위독하기 때문이다.

*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1일*

1926년 2월 11일
창덕궁에서 포도주 한 다스가 나간다

1926년 2월 11일, 순종은 위독한 노인에게 적포도주 한 다스를 보냈습니다. 실록에 딱 한 줄이 남아 있습니다.

받는 사람은 후작 이완용. 나라를 판 대가로 작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음 날 죽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손꼽히는 현금 부자로 죽었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의 인생을 돈으로 정산해 보겠습니다. 나라를 팔면, 정확히 얼마를 벌게 되는지. 기록에 다 남아 있습니다.


영어 잘하는 수재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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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察使全北李完用 … 以癏曠割剝, 並命免官査辦, 然竟無懲罰。

— 전북 관찰사 이완용 등이 직무를 팽개치고 백성을 수탈하여 면관과 조사를 명했으나, 끝내 아무 처벌이 없었다

*매천야록 권3 · 광무 4년*

觀察使全北李完用 … 以癏曠割剝, 並命免官査辦, 然竟無懲罰。

— 전북 관찰사 이완용 등이 직무를 팽개치고 백성을 수탈하여 면관과 조사를 명했으나, 끝내 아무 처벌이 없었다

*매천야록 권3 · 광무 4년*

이완용은 원래 매국노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영어 학교인 육영공원 출신,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한 엘리트 외교관이었습니다. 처음엔 친미파였고, 러시아가 세지자 친러파가 됐고, 일본이 이기자 친일파가 됐습니다.

지방관 시절의 기록도 있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 1900년입니다.

수탈로 파면 조사를 받고도 처벌받지 않는 것. 이완용의 인생은 이 문장의 반복입니다.


칼 세 번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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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首相カ人力車ニ乘リタル際 … 三ケ所ヲ刺サレ生命危篤ナリ

— 이 총리가 인력거에 오르는 순간 세 곳을 찔려 생명이 위독하다

*통감부 전보 제44호 · 1909년 12월 22일*

李首相カ人力車ニ乘リタル際 … 三ケ所ヲ刺サレ生命危篤ナリ

— 이 총리가 인력거에 오르는 순간 세 곳을 찔려 생명이 위독하다

*통감부 전보 제44호 · 1909년 12월 22일*

1905년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고, 1907년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스물두 살 청년 이재명이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렀습니다.

실록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칼에 찔려 부상이 심히 중하다」고 적혔습니다. 이완용은 살아남았습니다. 청년 이재명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됐습니다. 찌른 사람은 죽고, 찔린 사람은 여덟 달 뒤 나라를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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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하나, 백작 하나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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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址鎔、閔泳璘、李完用, 伯爵被授

—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에게 백작을 수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李址鎔、閔泳璘、李完用, 伯爵被授

—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에게 백작을 수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519년 조선이 문서 한 장으로 끝났습니다.

일본은 39일 만에 값을 치렀습니다.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작위가 뿌려집니다.

후작 여섯, 백작 셋, 자작 스물둘, 남작 마흔넷. 이완용은 백작이었습니다. 10년 뒤에는 공을 더 인정받아 후작으로 올라갑니다. 작위는 명예였고, 진짜 대가는 따로 있었습니다.


정산서 첫 줄 — 은사공채 15만 원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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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공채 15만 원 (1911) = 군수 월급의 3,000배 = 쌀 약 1,900톤 = 현재 약 30억 ~ 150억 원

— 백작 이완용에게 666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六百六拾六圓于伯爵李完用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2월 27일*

은사공채 15만 원 (1911) = 군수 월급의 3,000배 = 쌀 약 1,900톤 = 현재 약 30억 ~ 150억 원

— 백작 이완용에게 666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六百六拾六圓于伯爵李完用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2월 27일*

1911년 1월, 일본은 이완용에게 은사공채 15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50원이었습니다. 군수가 250년을 벌어야 하는 돈, 월급의 3천 배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적게 잡아 30억, 크게 잡으면 150억 원입니다.

왕실도 꼬박꼬박 돈을 얹었습니다. 실록에는 병합 넉 달 뒤 세밑에 이완용이 상여금 666원을 받은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위원회의 결론은 뜻밖입니다. 이 돈이 잔돈이었다는 겁니다.


진짜 돈은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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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금·하사금·뇌물 등 약 100만 원 ≈ 현재 약 200억 원 1925년 총재산 최소 300만 원 ≈ 현재 약 600억 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 2010*

은사금·하사금·뇌물 등 약 100만 원 ≈ 현재 약 200억 원 1925년 총재산 최소 300만 원 ≈ 현재 약 600억 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 2010*

이완용은 총리대신의 지위와 정보로 땅을 샀습니다. 헐값에 사들인 논밭이 경기도와 전라도에 걸쳐 여의도 면적의 7.7배. 병합에 앞장서던 바로 그 시기, 그의 재산은 세 배로 불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계산한 정산서의 마지막 줄은 이렇습니다.

나라를 판 직접 대가가 수십억. 그 자리를 이용해 불린 재산이 600억. 당시 언론이 꼽은 조선 최고 수준의 현금 부자였습니다.


포도주 한 다스

賜祭粢料金一千五百圓、棺材料金二百圓于侯爵李完用喪。

— 후작 이완용의 상에 제사 비용 1,500원과 관 값 200원을 하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2일*

賜祭粢料金一千五百圓、棺材料金二百圓于侯爵李完用喪。

— 후작 이완용의 상에 제사 비용 1,500원과 관 값 200원을 하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26년 2월 12일*

1926년 2월 11일의 포도주로 돌아갑니다. 다음 날 이완용은 죽었습니다. 실록은 장례 비용까지 적어 뒀습니다.

600억 부자의 마지막 장부는 나라가 내준 관 값 200원이었습니다. 무덤은 전북 익산에 썼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파헤쳐서, 1979년 후손들이 스스로 묘를 파서 화장했습니다. 지금 무덤은 없습니다.


닫는 말

돈은 다 썼고, 무덤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록은 한 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기록한국사였습니다.


출처

순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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