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세 15%…조선 500년 기록에 「관세」는 0번이었다 (본편)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저화 한 장은 쌀 두 말 | 태종실록 · 태종 2년 1월 9일 |
| 사람마다 저화를 싫어합니다 | 태종실록 · 태종 1년 10월 21일 |
| 베를 금지해야만 돌았다 | 세종실록 · 세종 3년 3월 27일 |
| 형벌을 써도 안 됐다 | 성종실록 · 성종 4년 2월 11일 |
| 쌀 두 말에서 쌀 한 되로 | 성종실록 · 성종 4년 5월 5일 |
| 종이가 지고 동전이 떴다 | 조선왕조실록 정본 348,925기사 |
1코인을 1원에 묶는다는 것

원화에 값을 묶은 디지털 화폐를 제도 안으로 들이겠다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값을 고정한 돈. 조선도 해 봤습니다. 종이돈이었습니다.
저화 한 장은 쌀 두 말

1402년 1월, 나라가 값을 못박습니다. 저화 한 장은 베 한 필, 쌀 두 말.
말로 정한 것이 아니라 국고의 쌀을 저화로 사게 하면서 정했습니다. 나라가 그 값에 사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준비자산을 걸고 값을 보증한 셈입니다.
사람마다 저화를 싫어합니다

값을 정한 이듬해, 사헌부가 저화를 없애자고 상소합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저화를 쓰지 않고 베를 써 왔는데, 사람마다 저화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태종의 답은 이랬습니다. 저화는 가볍고 편하니 나는 이것을 행하고자 한다.
베를 금지해야만 돌았다

1421년, 형조참판 홍여방이 아룁니다. 저화법을 세우면서 매매에 면포 쓰는 것을 금했더니, 잡혀가는 사람이 날로 많아 백성이 심히 괴로워한다고.
세종이 답합니다. 그러나 면포를 금하지 않으면 저화를 전혀 쓰지 않는다.
경쟁하는 돈을 금지해야만 유지되는 돈이었습니다.
형벌을 써도 안 됐다

1473년, 원상들이 지난 일을 돌아봅니다.
저화는 세종 때 유정현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시장 건물에 앉아 형벌을 몹시 혹독하게 썼는데도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값을 정하는 일과 값이 유지되는 일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쌀 두 말에서 쌀 한 되로

값은 무너졌습니다. 호조가 남긴 기록에 세조 대의 값이 적혀 있습니다.
1402년에 쌀 두 말 값이던 것이, 세조 대에는 그 스무 분의 일로 떨어졌습니다.
나라가 정한 값과 사람들이 쳐 준 값이 그만큼 벌어졌습니다.
종이가 지고 동전이 떴다
실록에서 저화를 적은 기사는 모두 314건인데, 태조부터 선조까지가 304건입니다. 광해군 이후 이백오십 년 동안은 열 건뿐입니다.
돈을 부어 만들고 유통시킨 일을 적은 기사는 반대입니다. 앞이 62건, 뒤가 274건.
종이가 물러난 자리를 동전이 채웠습니다.
기록이 남긴 것
지금 국회 회의록에서 「가상자산」이라는 말이 나온 회의는 1,510번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그 안에서 따로 세어 화면에 적었습니다.
조선의 기록이 남긴 것은 이것입니다. 나라가 「이 종이는 쌀 두 말이다」라고 정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값은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유지하려면 다른 돈을 금지해야 했고, 형벌까지 썼지만 안 됐습니다.
값을 무엇으로 받쳐 둘 것인가. 조선은 그 답을 나라의 말과 형벌에서 찾았고,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무엇으로 받쳐 둘 것인가
지금 논의가 준비자산과 공시를 먼저 말하는 것은, 그 자리에 다른 답을 놓으려는 것입니다.
숫자로 본 한국사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무엇으로 받쳐 둘 것인가
지금 논의가 준비자산과 공시를 먼저 말하는 것은, 그 자리에 다른 답을 놓으려는 것입니다.
저화 한 장은 쌀 두 말,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02년 1월, 나라가 값을 못박습니다.
베를 금지해야만 돌았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21년, 형조참판 홍여방이 아룁니다.
출처
태종실록 · 세종실록 · 성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