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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그들이 받은 값 — 다섯 이름과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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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된 기록

대목출전
다섯 이름고종실록 · 1905년 11월 25일 · 법부주사 안병찬 상소
최익현의 붓고종실록 · 1905년 11월 29일 · 최익현 상소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종실록 · 1904년 7월 25일 · 송규헌 상소
값이 치러지다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값이 치러지다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죽음으로 맞선 사람들고종실록 · 1905년 11월 30일
죽음으로 맞선 사람들고종실록 · 1905년 12월 2일 · 조병세 유소
칼을 맞은 사람들고종실록 · 1906년 2월 17일
칼을 맞은 사람들순종실록 · 1909년 12월 22일
오적이 스스로 쓴 글고종실록 · 1905년 12월 16일

이 대본의 원칙

오적의 이름은 당대 상소문 원문에 적힌 그대로 부른다. 후대의 규정이 아니다. 금액은 근거를 화면에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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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이름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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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大臣朴齊純、內部大臣李址鎔、 軍部大臣李根澤、學部大臣李完用、 農商工部大臣權重顯五賊者

—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 다섯 도적

*고종실록 · 1905년 11월 25일 · 법부주사 안병찬 상소*

外部大臣朴齊純、內部大臣李址鎔、 軍部大臣李根澤、學部大臣李完用、 農商工部大臣權重顯五賊者

—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 다섯 도적

*고종실록 · 1905년 11월 25일 · 법부주사 안병찬 상소*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이완용 · 권중현

을사오적.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대신입니다.

이 다섯이라는 숫자는 후대에 정한 것이 아닙니다. 조약을 맺은 지 여드레 만에 올라온 상소문에 이미 이름과 직책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법부의 하급 관리가 목숨을 걸고 올린 글입니다.


최익현의 붓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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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臣賊子, 何代無之? 而豈有如今番 擅印外約之外部大臣朴齊純 … 者乎?

—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만, 어찌 이번처럼 멋대로 외국과의 조약에 도장을 찍은 외부대신 박제순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고종실록 · 1905년 11월 29일 · 최익현 상소*

亂臣賊子, 何代無之? 而豈有如今番 擅印外約之外部大臣朴齊純 … 者乎?

—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만, 어찌 이번처럼 멋대로 외국과의 조약에 도장을 찍은 외부대신 박제순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고종실록 · 1905년 11월 29일 · 최익현 상소*

나흘 뒤에는 일흔셋의 최익현이 상소를 올립니다.

최익현은 이 상소 뒤 의병을 일으켰고, 대마도에 끌려가 굶어 죽습니다. 같은 해, 오적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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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法部大臣李址鎔, 斲國傷民, 苞苴成市, 衆論大激

— 전 법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깎아내고 백성을 상하게 했으며, 뇌물이 시장을 이루어 여론이 크게 격앙되었다

*고종실록 · 1904년 7월 25일 · 송규헌 상소*

前法部大臣李址鎔, 斲國傷民, 苞苴成市, 衆論大激

— 전 법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깎아내고 백성을 상하게 했으며, 뇌물이 시장을 이루어 여론이 크게 격앙되었다

*고종실록 · 1904년 7월 25일 · 송규헌 상소*

조약보다 한 해 앞선 1904년,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오적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이미 거기 있습니다.

같은 상소에 권중현도 나옵니다. 아첨으로 총애를 얻어 부귀를 누린다며 죄를 바로잡으라고 적었습니다. 처벌은 없었습니다.


값이 치러지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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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이완용 · 백작 이지용 자작 박제순 · 자작 이근택 자작 권중현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은사공채 총액 605만 원 = 지금 돈 약 3,600억 받은 사람 75명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백작 이완용 · 백작 이지용 자작 박제순 · 자작 이근택 자작 권중현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은사공채 총액 605만 원 = 지금 돈 약 3,600억 받은 사람 75명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그리고 1910년 8월, 나라가 넘어갑니다. 39일 뒤 값이 치러집니다. 오적 다섯 명은 전원 작위를 받았습니다.

은사공채는 백작이 약 15만 원, 자작이 5만에서 10만 원 선이었습니다. 이완용의 15만 원은 당시 군수 월급의 삼천 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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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맞선 사람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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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從武官長陸軍副將閔泳煥, 以韓、日新約憤惋, 自刃死之。

— 시종무관장 육군부장 민영환이 한일신약에 분개하여 스스로 칼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실록 · 1905년 11월 30일*

齊純、址鎔、根澤、完用、重顯五賊, 論以大逆不道

—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다섯 도적을 대역부도로 논하소서

*고종실록 · 1905년 12월 2일 · 조병세 유소*

侍從武官長陸軍副將閔泳煥, 以韓、日新約憤惋, 自刃死之。

— 시종무관장 육군부장 민영환이 한일신약에 분개하여 스스로 칼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실록 · 1905년 11월 30일*

齊純、址鎔、根澤、完用、重顯五賊, 論以大逆不道

—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다섯 도적을 대역부도로 논하소서

*고종실록 · 1905년 12월 2일 · 조병세 유소*

조약이 맺어진 지 열사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실록은 열여섯 자로 적었습니다.

이틀 뒤에는 원임의정 조병세가 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그가 죽으며 남긴 상소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죽으면서까지 다섯 이름을 적었습니다.


칼을 맞은 사람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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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夜, 軍部大臣李根澤家, 有刺客攔入, 該大臣身受創傷

— 지난밤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자객이 뛰어들어 그 대신이 몸에 상처를 입었다

*고종실록 · 1906년 2월 17일*

內閣總理大臣李完用被刺, 負傷甚重

—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칼에 찔려 부상이 매우 심하다

*순종실록 · 1909년 12월 22일*

去夜, 軍部大臣李根澤家, 有刺客攔入, 該大臣身受創傷

— 지난밤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자객이 뛰어들어 그 대신이 몸에 상처를 입었다

*고종실록 · 1906년 2월 17일*

內閣總理大臣李完用被刺, 負傷甚重

—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칼에 찔려 부상이 매우 심하다

*순종실록 · 1909년 12월 22일*

백성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조약 석 달 뒤,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자객이 들었습니다.

이근택은 살아남았습니다. 1907년에는 나철이 오적 암살단을 꾸렸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습니다. 그 공술에도 다섯 이름이 그대로 나옵니다.

1909년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에게 세 곳을 찔렸습니다. 역시 살아남았습니다.

찌른 청년 이재명은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여덟 달 뒤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오적이 스스로 쓴 글

臣等之偃然盤踞于廟堂之上者, 非無恥也。 竊觀時局, 亦有所不得不爾者也。

— 신들이 뻔뻔하게 조정에 버티고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국을 살펴보니 또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고종실록 · 1905년 12월 16일*

臣等之偃然盤踞于廟堂之上者, 非無恥也。 竊觀時局, 亦有所不得不爾者也。

— 신들이 뻔뻔하게 조정에 버티고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국을 살펴보니 또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고종실록 · 1905년 12월 16일*

그런데 오적 다섯 명이 함께 올린 상소도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사직을 청하는 글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백이십 년 전 그들의 변명이 자기 손으로 실록에 적혀 있습니다. 사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섯 명 모두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뒤의 삶

다섯 사람의 뒷날은 이렇습니다.

이완용은 후작까지 올라 1926년 죽었습니다. 재산은 지금 돈으로 약 600억. 박제순은 중추원 고문을 지내다 1916년에, 이근택은 1919년에 죽었습니다. 권중현은 1934년까지 살았고, 이지용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해 작위를 한때 박탈당했다가 되돌려 받았습니다.

다섯 명 모두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해방된 뒤에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그 이름들을 다시 불렀지만, 그때 다섯은 이미 모두 죽은 뒤였습니다.


남은 문장

亂臣賊子, 人人得以誅之

—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이를 벨 수 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5일 · 안병찬 상소*

亂臣賊子, 人人得以誅之

—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이를 벨 수 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5일 · 안병찬 상소*

기록은 판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록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1905년 11월, 이름을 부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 글이 실록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백이십 년이 지나도 이 문장은 그대로 있습니다. 기록한국사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 대본의 원칙,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총 분량 내레이션 약 1,950자 · 5분 00초 (1.2배속 기준)

다섯 이름,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대신입니다.

이미 알려져 있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조약보다 한 해 앞선 1904년,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출처

고종실록 · 순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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