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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판 값 1등은 이완용이 아니었다 — 윤덕영 46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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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된 기록

대목출전
어보 지킨 값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황해도의 십만 냥대한계년사 · 1902년 2월 16일
병합 17일 전순종실록 · 1910년 8월 5일
병합 17일 전매천야록 권6 · 융희 4년
자작, 그리고 46만 원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자작, 그리고 46만 원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왕실에서도 나갔다순종실록 부록 · 1911년 2월 10일
인왕산 아래 서양식 저택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 언론 보도
1919년, 그의 이름윤치호 일기 · 1919년 3월 4일
1919년, 그의 이름기려수필 · 1918년 조

이 대본의 원칙

과장하지 않는다. 제목은 자극적이어도 본문은 기록만 말한다. 소문으로 남은 것은 소문이라고 밝힌다(고종 독살설).

모든 인용은 parsed/ 원문에서 가져왔고 기사 ID를 붙였다. 화면에 원문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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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 지킨 값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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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어보가 어떤 연유로 윤 자작의 집에 약 열흘 동안 유하게 됐는데, 귀중한 어보를 잘 간수하느라고 애를 쓴 공로로 46만 원의 공채증권이 내리게 됐다

— 어보를 열흘 맡아 준 공로로 46만 원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황제의 어보가 어떤 연유로 윤 자작의 집에 약 열흘 동안 유하게 됐는데, 귀중한 어보를 잘 간수하느라고 애를 쓴 공로로 46만 원의 공채증권이 내리게 됐다

— 어보를 열흘 맡아 준 공로로 46만 원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나라를 판 값
1등은 이완용이 아니었다

이완용이 받은 은사공채는 15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세 배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작위는 이완용보다 두 단계 낮은 자작이었는데, 돈은 46만 원을 받았습니다.

1926년 조선일보가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보, 그러니까 나라의 도장입니다. 그걸 열흘 보관한 값이 46만 원. 그런데 그 도장은 원래 그의 조카가 지키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황해도의 십만 냥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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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海道民李錫茂等二十七人等, 訴于內部, 臚列海察尹德榮之貪虐事狀

— 황해도민 이석무 등 27명이 내부에 소장을 올려 관찰사 윤덕영의 탐학한 실상을 낱낱이 열거하다

*대한계년사 · 1902년 2월 16일*

黃海道民李錫茂等二十七人等, 訴于內部, 臚列海察尹德榮之貪虐事狀

— 황해도민 이석무 등 27명이 내부에 소장을 올려 관찰사 윤덕영의 탐학한 실상을 낱낱이 열거하다

*대한계년사 · 1902년 2월 16일*

윤덕영은 명문가 사람이었습니다. 조카가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였으니 왕실의 외척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자리였습니다.

병합 여덟 해 전, 그는 황해도 관찰사였습니다. 그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 날 기록은 더 구체적입니다. 백성의 돈 십여만 냥을 빼앗은 일로 평리원이 그를 잡아들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처벌받은 기록은 없습니다.


병합 17일 전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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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從一品侍從院卿尹德榮 … 陞正一品輔國

— 시종원경 윤덕영을 정1품 보국으로 올리도록 명하다

*순종실록 · 1910년 8월 5일*

尹德榮, 除其親婭人直閣七十餘窠。

— 윤덕영이 자기 인척들을 직각 자리 일흔 몇 개에 앉혔다

*매천야록 권6 · 융희 4년*

命從一品侍從院卿尹德榮 … 陞正一品輔國

— 시종원경 윤덕영을 정1품 보국으로 올리도록 명하다

*순종실록 · 1910년 8월 5일*

尹德榮, 除其親婭人直閣七十餘窠。

— 윤덕영이 자기 인척들을 직각 자리 일흔 몇 개에 앉혔다

*매천야록 권6 · 융희 4년*

1910년 8월 5일, 그는 종1품에서 정1품 보국으로 올라갑니다.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이 찍히기 열이레 전이었습니다.

같은 해 매천 황현은 이런 한 줄을 남겼습니다.

일흔 자리입니다. 나라가 넘어가는 그해에 한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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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그리고 46만 원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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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純、高永喜、趙重應 … 尹德榮 … 子爵被授

—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윤덕영 등에게 자작을 수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자작 평균 은사공채 3만 원 백작 이완용 15만 원 자작 윤덕영 46만 원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朴齊純、高永喜、趙重應 … 尹德榮 … 子爵被授

—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윤덕영 등에게 자작을 수여하다

*순종실록 부록 · 1910년 10월 7일*

자작 평균 은사공채 3만 원 백작 이완용 15만 원 자작 윤덕영 46만 원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

병합 39일 뒤, 작위가 뿌려집니다. 윤덕영은 자작이었습니다.

자작에게 준 은사공채는 보통 3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윤덕영만 46만 원. 같은 자작의 열다섯 배, 백작 이완용의 세 배입니다.

작위는 낮고 돈은 제일 많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그 액수가 말해 줍니다.


왕실에서도 나갔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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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賜金二千圓于子爵尹德榮。 德壽宮亦下賜金五百圓。

— 자작 윤덕영에게 특별히 2천 원을 하사하다. 덕수궁에서도 5백 원을 내리다

*순종실록 부록 · 1911년 2월 10일*

特賜金二千圓于子爵尹德榮。 德壽宮亦下賜金五百圓。

— 자작 윤덕영에게 특별히 2천 원을 하사하다. 덕수궁에서도 5백 원을 내리다

*순종실록 부록 · 1911년 2월 10일*

일본만 준 것이 아닙니다. 조카가 황후였으니 궁에서도 돈이 나갔습니다. 1911년 2월, 그의 어머니 회갑에 실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열흘 뒤에는 황후가 직접 그의 집을 찾아 잔치에 참석합니다. 그가 어보를 가져간 지 반년 만이었습니다.


인왕산 아래 서양식 저택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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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옥인동 36,361평 중 53% 소유 1933년 총재산 100만 원 ≈ 지금 돈 100억 원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 언론 보도*

1917년 옥인동 36,361평 중 53% 소유 1933년 총재산 100만 원 ≈ 지금 돈 100억 원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 언론 보도*

그 돈으로 그는 인왕산 아래 땅을 샀습니다. 1917년 옥인동 전체 땅 36,361평 가운데 53퍼센트가 그의 것이었습니다. 동네의 절반입니다.

그 위에 프랑스식 3층 저택을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벽수산장이라 불렀고,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개인 저택이었습니다.


1919년, 그의 이름

The agitators circulate the statements that the Ex-Emperor was poisoned by 尹德榮, 韓相鶴

— 고종이 윤덕영과 한상학에 의해 독살됐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

*윤치호 일기 · 1919년 3월 4일*

逆臣尹德榮·韓相鶴·李完用等, 毒弑太皇

— 역신 윤덕영·한상학·이완용 등이 태황제를 독살했다

*기려수필 · 1918년 조*

The agitators circulate the statements that the Ex-Emperor was poisoned by 尹德榮, 韓相鶴

— 고종이 윤덕영과 한상학에 의해 독살됐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

*윤치호 일기 · 1919년 3월 4일*

逆臣尹德榮·韓相鶴·李完用等, 毒弑太皇

— 역신 윤덕영·한상학·이완용 등이 태황제를 독살했다

*기려수필 · 1918년 조*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입에 오른 이름이 그였습니다. 윤치호는 그해 3월 4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기려수필에도 있습니다. 안동 선비 유신영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둡니다. 이것은 당대에 퍼진 말이고, 독살을 입증한 기록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 시절 사람들이 그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문장

1926년 순종이 죽자, 순종의 일생을 적는 행장을 그가 썼습니다. 자기가 옥새를 가져갔던 그 임금의 마지막 기록을, 자기 손으로 적은 것입니다.

벽수산장은 1966년 불타고 1973년 헐렸습니다. 지금은 기둥 몇 개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은 한 줄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기록한국사였습니다.


출처

순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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