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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2026년 08월 28일·9분 분량·원자료 직접 집계

담배보다 흔해진 약, 그리고 조선이 8년을 알고도 만들지 않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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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기록한국사 「담배보다 흔해진 약…조선은 아편을 8년 전에 알고도 법이 없었다」 편의 원문 전체와 찾아본 과정입니다. 영상은 3분이라 인용을 잘라 썼습니다. 여기에는 다 싣습니다.

1. 오늘의 숫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청소년 유해약물 이용 실태와 정책 방안 연구」입니다.

조사 대상중·고등학생 3,384명
의료용 마약류 7종 중 하나 이상을 비의료 목적으로 사용5.2%
같은 조사의 흡연 경험4.2%

약이 담배를 넘어섰습니다.

무엇을 먹었나 (최근 6개월 사용자 기준)

비율
주의력 결핍 치료제(ADHD)24.4%
식욕억제제20.0%
수면제13.3%
신경안정제·항불안제13.3%

왜 먹었나

이유비율
우울·불안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덜려고31.1%
집중력을 높이거나 학업·업무 효율을 올리려고24.4%
외모를 개선하거나 체중을 조절하려고20.0%

주의력 치료제를 쓴 청소년 가운데 23.1%가 한 달 평균 20회 이상 먹었다고 답했습니다. 관련 진료비는 4년 사이 네 배가 됐습니다.


2. 조선은 언제 알았나 — 1840년

아편전쟁이 터지기 석 달 전입니다. 청에 다녀온 통역관(수역)이 조정에 별단을 올렸습니다.

一, 西洋人入中國者, 播傳邪敎, 陷溺人心, 挾帶鴉片, 戕害身命, 而愚氓之受其毒者, 始則被人引諉, 繼則習染邪說, 甚至蕩産戕生, 罔知悛改, 皇帝震怒, 屢下諭旨, 嚴加禁斷。 上自朝官, 下至軍民, 以此獲罪, 不下屢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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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종실록 6년(1840) 3월 25일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하나. 서양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온 자들이 사교를 퍼뜨려 인심을 빠뜨리고, 아편을 끼고 들어와 사람의 목숨을 해칩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그 독을 입으면 처음에는 남에게 이끌리다가 이어 사설에 물들어, 심하면 재산을 다 날리고 몸을 상하면서도 뉘우칠 줄을 모릅니다. 황제가 진노하여 여러 번 유지를 내려 엄히 금했습니다. 위로 조정 관원부터 아래로 군인과 백성까지 이 일로 죄를 받은 자가 수만 명을 밑돌지 않습니다.

주목할 것은 마지막 줄입니다. 「수만 명」이라는 규모까지 적혀 있습니다. 조선은 무엇이 오는지, 저쪽에서 몇 사람이 무너졌는지를 문서로 받아 두고 있었습니다.


3. 8년 뒤, 의주 — 1848년 3월 26일

사신 행렬이 돌아오는 길에 의주(灣府)에서 짐 검사를 했습니다.

○ 鄭基世, 以備邊司言啓曰, 卽聞節行之回, 畫員朴禧英貿來鴉片烟, 現捉於灣府, 搜卜之際, 烟雖不能捉得, 吸烟之具, 皆已露出, 至於官庭碎破之境矣。 此蓋出於西夷, 而其害則將禍國家戕人命而後已, 故年來大國之亦所痛禁, 而何物禧英, 乃敢潛自貿來, 欲爲傳播於國中者, 亦係一變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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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헌종 14년(1848) 3월 26일
정기세가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들으니 사행이 돌아올 때 화원 박희영이 아편 연초를 사 왔다가 의주에서 붙잡혔습니다. 짐을 뒤질 때 연초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피우는 기구가 모두 드러나 관아 마당에서 부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서양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 해로움은 장차 나라에 화를 입히고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한 뒤에야 그칠 것이므로 근래 대국에서도 몹시 금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희영이라는 자가 감히 몰래 사 와서 나라 안에 퍼뜨리려 했으니 이 또한 하나의 변괴입니다…」

「연초는 못 찾고 기구만 나왔다」는 대목이 뒤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4월 1일 — 파면

○ 又以禮曹言啓曰, 卽接圖畫署手本, 則畫員朴禧英, 以回還節使行中畫員, 被捉鴉片烟具於灣府搜卜之際, 形跡掀露, 情節叵測, 如此負犯之人, 不可仍置, 卽爲汰去爲辭矣。 朴禧英之罪犯旣如此, 依手本汰去,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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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헌종 14년(1848) 4월 1일

도화서가 「이런 자를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즉시 파면하라」고 올렸고, 그대로 윤허됐습니다. 사건이 난 지 엿새 만입니다. 여기까지는 빨랐습니다.


4. 벽에 부딪힌 자리 — 4월 29일

首其吸試矣, 國俗所未聞所未有必禁乃已之事, 渠敢無難倡始, 其在防微社漸之義, 辟以止辟之政, 死有餘罪, 而特以所謂鴉片之不入搜檢, 若是抵賴, 且國法律文中, 無可以旁照而確據者, 一律當否, 不可不詢以後斷之, 令廟堂論理稟處爲良如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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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헌종 14년(1848) 4월 29일
스스로 앞장서 피워 시험했습니다. 나라 풍속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반드시 금해야 할 일을 저가 거리낌 없이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조짐을 막고 번짐을 막는 뜻으로 보면, 형벌로써 형벌을 그치게 하는 정사로 보면 죽어도 남는 죄입니다. 다만 이른바 아편이 수색에서 나오지 않아 이처럼 발뺌하고 있고, 또 나라 법 조문 가운데 견주어 확실히 근거 삼을 것이 없으니, 사형이 마땅한지 아닌지를 물어본 뒤에 결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이치를 따져 아뢰어 처리하게 하소서.

한 문장 안에 「죽어도 남는 죄」와 「견줄 조문이 없다」가 나란히 있습니다.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적을 자리가 없어서 멈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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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 5월 9일

○辛巳/命秋曹囚朴禧英, 減死爲奴于楸子島。 禧英, 象譯流也, 鴉片烟取吸器具, 被捉於灣府, 而用律無可據, 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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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종실록 14년(1848) 5월 9일
형조에 갇힌 박희영을 사형에서 한 등급 낮추어 추자도의 종으로 삼으라 명했다. 희영은 역관 계통 사람이다. 아편 피우는 기구를 의주에서 붙잡혔는데, 법을 적용할 근거가 없어 이런 명이 있었다.

적발부터 처분까지 넉 달 열사흘입니다.


6. 찾아본 과정

AI_역사DB 의 실록·승정원일기 전문에서 鴉片·阿片 으로 전수 검색했습니다.

사료건수
실록(태조~철종)2건 — 1840년 별단, 1848년 처분
승정원일기이 사건 관련 3건(3월 26일 · 4월 1일 · 4월 29일)

두 건뿐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뼈대입니다. 1840년에 보고를 받고 1848년에 사람을 잡을 때까지, 그 사이 아편을 다룬 조선 조정의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화원인가 역관인가

실록은 박희영을 象譯流(역관 계통)라 적고, 승정원일기는 畫員(화원)이라 적습니다. 도화서가 파면 문서를 올린 것으로 보아 화원이 맞고, 실록의 표현은 사행에 딸린 기술직을 묶어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영상에서는 승정원일기를 따라 「그림 그리는 관리」로 썼습니다.

영상에서 뺀 것

  • 1840년 별단의 뒷부분에는 사치 풍조에 대한 황제의 유지가 이어집니다

(「팔기 군병 6품 이하는 비단옷을 입지 말라」). 아편과 나란히 「기강이 무너진 징표」로 묶여 보고됐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3분에 넣지 못했습니다.

  • 4월 29일 문서의 「辟以止辟」(형벌로써 형벌을 그치게 한다)은 『서경』의 말입니다.

처벌의 목적을 본보기에 두는 사고인데, 정작 본보기로 삼을 조문이 없었습니다.


7. 무엇을 읽었나

조선은 1840년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오는지, 저쪽에서 몇 사람이 무너졌는지 문서로 받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법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8년 뒤 첫 사람을 잡고도 벌할 조문이 없어 넉 달을 의논했습니다. 「죽어도 남는 죄」라고 적으면서도 형을 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는 것과 대비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때도 숫자는 이미 와 있었습니다 — 「죄를 받은 자가 수만 명」이라는 한 줄로요.

지금 우리 앞에도 숫자가 와 있습니다. 5.2퍼센트, 그리고 담배를 넘어섰다는 한 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실록에 아편 기사가 정말 두 건뿐인가요?

鴉片·阿片 으로 태조부터 철종까지 전문을 훑었습니다. 1840년 별단과 1848년 처분, 두 건입니다. 승정원일기에는 1848년 사건 처리 기록이 세 건 더 있습니다(3월 26일· 4월 1일·4월 29일). 다만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 다른 이름으로 적혔거나 지방 문서에만 남았을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왜 사형을 시키지 못했나요?

두 가지가 겹쳤습니다. 하나는 아편 실물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 「연초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피우는 기구가 모두 드러났다」고 적혀 있고, 그래서 「이처럼 발뺌하고 있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다른 하나가 조문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 법 조문 가운데 견주어 확실히 근거 삼을 것이 없다」가 그 문장입니다. 조선의 형률은 대명률을 준용했는데, 아편은 그 안에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아편전쟁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1840년 별단이 올라온 것이 3월 25일이고, 아편전쟁은 그해 6월에 터졌습니다. 전쟁 전에 이미 청의 단속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별단은 단속의 규모를 「죄를 받은 자가 수만 명을 밑돌지 않는다」로 적었습니다.

박희영은 화원인가요, 역관인가요?

사료가 갈립니다. 승정원일기는 畫員(화원)이라 적고, 실록은 象譯流(역관 계통)라 적습니다. 도화서가 파면 문서를 올린 것으로 보아 화원이 맞고, 실록의 표현은 사행에 딸린 기술직을 묶어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사신 행렬을 따라간 사람이라는 사실은 같습니다.


출전

  • 헌종실록 6년(1840) 3월 25일 · 14년(1848) 5월 9일
  • 승정원일기 헌종 14년(1848) 3월 26일 · 4월 1일 · 4월 29일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청소년 유해약물 이용 실태와 정책 방안 연구」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에서 날짜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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