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2시 사이렌 20분…조선의 대비는 성 쌓기 1,599건이었다
한눈에 — 오늘 오후 2시,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실록에서 성을 쌓거나 고쳤다는 기사는 1,599건입니다.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그들의 대비는 공사였다 | 조선왕조실록 정본 348,925기사 |
| 지금도 서 있는 것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 CC0 |
| 성은 무엇이라고 적혔나 | 태조실록 · 1394년 2월 29일 |
| 지킬 곳을 만들고, 들어오라고 했다 | 세종실록 · 1419년 12월 1일 |
| 알리는 일과 들어갈 곳 | 제21~22대 국회회의록 |
오후 2시, 20분

오늘 오후 2시,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15분 동안 가까운 지하나 대피소로 들어가고, 2시 20분에 해제됐습니다.
거리가 잠깐 비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20분입니다.
조선도 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쓴 것은 20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대비는 공사였다

실록에서 성을 쌓거나 고쳤다는 기사는 1,599건입니다. 봉수로 알렸다는 기사가 490건, 성에 들어가 지켰다는 기사가 388건, 피란했다는 기사가 326건입니다.
가장 많은 것이 성 쌓기입니다. 훈련이 아니라 공사였습니다.
지금도 서 있는 것

그렇게 쌓은 것이 지금도 서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1796년에 끝났습니다. 조선이 마지막으로 크게 쌓은 성입니다.
돌 하나하나가 사람 손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성은 무엇이라고 적혔나

城者 國家之藩籬 禦暴保民之所 不可不備
— 성은 나라의 울타리요 폭력을 막고 백성을 지키는 곳이니 갖추지 않을 수 없다
*태조실록 · 1394년 2월 29일*
태조 3년의 기록에 성이 무엇인지 적혀 있습니다.
성은 나라의 울타리요, 폭력을 막고 백성을 지키는 곳이니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앞 해 가을에 경기·양광·서해·교주·강릉 다섯 도의 백성을 불러 도성을 쌓게 했습니다.
같은 문서의 다음 문장

或因木石 或因疾病而殞命者有之 予甚愍焉
— 나무와 돌에 치이거나 병이 들어 목숨을 잃은 자가 있으니, 내가 매우 가엾다
*태조실록 · 1394년 2월 29일*
바로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부역에 나간 뒤 나무와 돌에 치이거나 병이 들어 목숨을 잃은 자가 있다.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임금은 그 집의 부역을 3년간 면제하고,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어 올리라고 명합니다.
백성을 지키려고 쌓은 성이었는데, 쌓다가 백성이 죽었습니다. 두 달 뒤에는 그 부역 때문에 가을갈이를 놓쳤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지킬 곳을 만들고, 들어오라고 했다

宜令邊民淸野入保
— 변방 백성은 들을 비우고 성에 들어가 지키게 해야 합니다
*세종실록 · 1419년 12월 1일*
성을 쌓은 다음에는 사람을 들여야 했습니다. 청야입보입니다. 들을 비우고 성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적이 오면 곡식과 우물을 남기지 않고 모두 성 안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성에 들어가 지켰다는 기사가 388건 남았습니다.
알리는 일과 들어갈 곳
지금 국회 기록에는 경보와 사이렌이 2,267건 남아 있습니다. 대피는 624건, 민방위는 272건입니다. 그런데 대피소나 방공호를 말한 발언은 37건이었습니다.
봉수는 알리는 장치였고 성은 들어갈 곳이었습니다. 조선은 알리는 데 490건, 들어갈 곳을 만드는 데 1,599건을 적었습니다. 세 배 넘게 들어갈 곳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물론 그 공사에는 값이 따랐습니다. 사람이 죽었고 농사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그 기록에는 지킨다는 말과 가엾다는 말이 한 문서에 나란히 있습니다.
오늘 20분 동안 우리가 들어간 곳은 어디였는지, 사이렌이 멈춘 뒤에 남는 질문은 그것입니다.
숫자로 본 한국사였습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세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