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APEC 북미회담설…도와달라 불렀더니 대원군을 끌고 갔다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오래 등진 사이 | 매천야록 · 1881년 |
| 열세 달 | 고종실록 · 1882년 6월 5일 |
| 겨를 섞다 | 매천야록 · 1882년 |
| 삼 년 한 달 | 고종실록 · 1885년 8월 27일 |
오래 등진 사이

오래 등지고 있던 나라들이 마주 앉는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백사십 년 전에도, 조선이 한 나라를 향해 손을 내민 적이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했고, 그 나라는 왔습니다. 그런데 왜 왔는지는 우리 기록이 아니라, 상대편 대신의 속셈을 적어 둔 여덟 글자에 남아 있습니다.
그 여덟 글자 앞에, 먼저 볼 것이 있습니다.
열세 달

1882년 6월 5일, 영의정이 임금에게 아룁니다. 도성 군인들이 창고지기를 두들겨 팼다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급료가 열세 달째 밀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한 달 치를 내주는데, 받아 보니 섬이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되묻습니다. 열세 달 밀린 것도 딱한데, 섬이 온전치 않은 건 또 무슨 까닭이냐.
겨를 섞다

같은 자리에서 영의정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저들이 바라보는 것은 쌀 아홉 말뿐인데, 그것조차 해가 바뀌도록 받지 못했다고.
매천야록은 더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급료를 나눠 주던 창고지기가 쌀에 겨를 섞어 바꿔치고 그 이문을 챙겼다고요.
나흘 뒤, 군인들이 칼을 뽑아 땅을 치며 외칩니다.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다. 임오군란입니다.
잘못 전해진 소식

불길은 궁궐까지 갔습니다. 대신 둘이 죽었고, 조정은 중전의 장례 절차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12일, 영의정이 아룁니다. 이 일을 북경과 일본에 급히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그런데 소식은 그보다 먼저 갔습니다. 마침 청나라 천진에 조선 관리 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윤중과 김윤식입니다. 전보로 중전이 시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홍장을 찾아가, 죄를 물어 달라 청했습니다.
중전은 살아 있었습니다. 궁을 빠져나가 숨어 있었을 뿐입니다.
여덟 글자

청은 왔습니다. 매천야록은 이홍장이 군대를 보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국이 오래 떨치지 못했으므로, 한번 외번에 위엄을 보이고자 했다.
외번은 바깥의 울타리, 곧 속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을 구하려고가 아니라 조선에 위엄을 보이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마건충과 정여창이 수군 수천을 뽑아, 밤을 새워 동쪽으로 떠납니다.
조용한 군대

군대는 남양 마산포에 내려 숭례문 밖에 진을 쳤습니다. 진정시키러 왔다고 했고, 실제로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했습니다.
매천야록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동이 매우 한가로워 도성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같은 무렵 그들이 내건 방문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습니다. 지금 대군이 물과 뭍으로 함께 들어와 이미 스무 개 영에 이르렀다.
세 번째 초대
청 장수들이 대원군을 초청합니다. 첫 번째 자리는 극진했습니다. 두 번째도 그랬습니다.
세 번째 부름에 대원군은 거리낌 없이 가마를 대령시킵니다. 곁에 있던 정현덕이 붙잡습니다. 대감, 이번에 가시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대원군은 듣지 않았습니다. 1882년 7월 13일, 그날 오전에는 제독 오장경이 병사 백 명을 데리고 운현궁에 다녀갔습니다.
첫째 문, 둘째 문
진영에 닿자 첫째 문에서 가마를 내리라 했습니다. 둘째 문에서는 따라온 사람들을 막았습니다. 앞선 두 번과 달랐습니다.
그제야 변고를 알아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박당했고, 입이 막혔고, 다시 가마에 넣어졌습니다. 가마는 뒷문으로 빠져나가 마산포까지 달렸고, 배는 곧 떠났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종자들에게는 이렇게 둘러댔습니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오늘은 진중에서 주무시고, 내일 모셔다 드리겠다.
한 줄과 한 마을
실록은 이 일을 딱 한 줄로 적었습니다.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하다.
남은 것은 도성이었습니다. 오장경은 처음에 도성 전체를 치려 했습니다. 조영하가 하루 밤낮 동안 궁궐과 청군 진영을 열 번 오가며 말렸습니다.
결국 난을 일으킨 군인들이 많이 살던 왕십리만 덮쳤습니다. 미리 들은 집들은 통째로 달아났고, 걷지 못한 노약자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삼 년 한 달
대원군은 청나라 보정부에 머물게 됩니다. 조선은 해마다 사신 편에 문안 갈 사람을 딸려 보냈습니다.
그해 겨울 임금이 돌아온 사신에게 묻습니다. 이번에 가서 뵈었느냐. 뵙지 못했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런 엄동에 물과 흙도 다른데, 편안하시다더냐. 돌려보내 달라는 청은 여러 해 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885년 8월 27일, 임금은 남대문 안까지 나가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았습니다. 삼 년 한 달 만이었습니다.
도와달라고 불렀고, 도움은 왔고,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 이렇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흐를지, 기록은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열세 달,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882년 6월 5일, 영의정이 임금에게 아룁니다.
잘못 전해진 소식,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6월 12일, 영의정이 아룁니다.
세 번째 초대,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882년 7월 13일, 그날 오전에는 제독 오장경이 병사 백 명을 데리고 운현궁에 다녀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