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군함이 조선 섬을 2년 동안 차지했다 — 1885년 거문도」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산꼭대기의 깃발 | 고종실록 · 1885년 4월 6일 |
| 먼저 알려 온 것은 이웃이었다 | 고종실록 · 1885년 3월 20일 |
| 긴요한 땅 | 고종실록 · 1885년 4월 7일 |
| 아직도 철수하지 않으니 | 고종실록 · 1885년 5월 25일 |
| 삼 년 | 고종실록 · 1887년 4월 17일 |
| 그 자리에 진을 두다 | 고종실록 · 1887년 3월 17일 |
산꼭대기의 깃발

남해의 작은 섬 하나가 어느 날 남의 나라 차지가 됐습니다.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1885년 봄, 임금이 관리 둘을 전라도 앞바다로 내려보냅니다. 거문도, 지금 여수 앞바다에 있는 섬입니다.
가서 본 것을 그대로 적어 올렸습니다. 그 섬에 이르러 보니 귀국 병함 여섯 척과 상선 두 척이 섬 안에 정박해 있었고, 섬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도 보았다.
병함은 군함입니다. 조선 땅에 영국 군함 여섯 척이 들어와 있었고, 산꼭대기에는 영국 깃발이 올라 있었습니다.
먼저 알려 온 것은 이웃이었다

조선이 이 일을 처음 안 건 자기 바다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해 3월 20일, 청나라에서 편지가 먼저 도착합니다. 청의 외교를 맡고 있던 북양대신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편지는 사정부터 설명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데, 러시아 군함이 한 항구에 모이자 영국이 그걸 막으려고 그 섬에 군함을 대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물었습니다. 그 섬은 조선의 관할 땅인데, 영국 공사가 귀국에 수사의 정박지로 빌리자고 상의한 적이 있는가.
수사는 해군입니다. 조선 땅 이야기를 옆 나라가 조선보다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빌린다고 했다

같은 편지에 판단 기준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잠깐 배를 대고 기한을 정해 물러간다면 사정을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 빌리고 돌려주지 않거나, 사거나 세내려 한다면 결코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지 이유가 바로 뒤에 붙었습니다. 유럽 사람이 남양을 잠식할 때에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고, 뒤에는 마침내 제 것으로 삼았다. 향항도 영국이 차지하기 전에는 초가 몇 채뿐이었다.
향항은 홍콩입니다. 빌린다는 말로 시작해 아예 남의 땅이 된 사례를 들이민 겁니다.
무슨 명으로

섬에 간 조선 관리들이 정박한 배에 까닭을 물었습니다.
배 책임자는 제독의 명령이라고 답합니다. 제독은 함대를 이끄는 사령관입니다. 그런데 그 제독이 지금 일본에 있다고 했습니다.
관리들은 배를 얻어 타고 일본 나가사키까지 건너갑니다. 거기서 제독을 만나 물은 말이 기록에 남았습니다.
이미 우의를 맺은 사이인데 우방의 땅을 차지한 것은 누구의 명에서 나왔으며, 또 무슨 까닭인가.
사이좋게 지내자고 조약까지 맺어 놓고 왜 남의 땅을 차지했느냐는 겁니다.
점거해 지키고 있다

회답은 짧았습니다.
본 제독은 본국 정부의 명을 받들어 거느린 병선으로 거문도를 점거해 지키고 있다. 본국 정부의 뜻을 헤아리건대 아마 잠시 빌려 쓰는 것일 터이다.
본국이 시켜서 했고, 아마 잠깐일 거고, 답이 오면 알려 주겠다는 겁니다.
빌린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차지하고 지킨다는 말이 먼저 있었습니다.
긴요한 땅

이튿날 조선의 외교 책임자가 북경에 있던 영국 대신에게 전보를 칩니다.
요사이 귀 공사의 밀함을 받으니 우리나라의 그 섬을 빌려 잠시 거주하려 한다고 했다. 살펴보니 이 섬은 우리나라의 긴요한 땅이라 귀국이라 해서 감히 허락할 수 없다. 어느 나라가 청하더라도 결단코 허락할 이치가 없다.
밀함은 비밀 편지입니다.
빌려 달라는 요청이 도착한 건 섬을 차지한 뒤였습니다. 순서가 거꾸로였습니다.
만국공법에 그런 이치가 없다
같은 날 영국 부영사에게 보낸 글은 더 셉니다.
이 섬은 우리나라의 땅이니 다른 나라가 점유해서는 안 된다. 만국공법에 본래 이런 이치가 없다. 공법에 밝은 귀국이 어찌 이런 뜻밖의 거조가 있는가.
만국공법은 그때 국제법을 부르던 말이고, 거조는 처사라는 뜻입니다. 법을 제일 잘 안다는 나라가 왜 이러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조선이 쓸 수 있는 방법을 적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의리상 잠자코 볼 수 없으며, 또 동맹 각국에 성명하여 그 공론을 듣겠다.
군대를 보내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알리겠다는 것. 그게 손에 쥔 전부였습니다.
아직도 철수하지 않으니
그해 5월, 임금이 신하들 앞에서 말합니다. 거문도에 다른 나라 사람이 멋대로 자리 잡고 아직도 철수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그 기사에 달린 주석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3월 1일에 거문도를 점거하고 포대를 쌓아 오는 길을 막았다.
포대는 대포를 걸어 놓는 진지입니다. 잠깐 배를 댄 게 아니라 자리를 잡은 겁니다.
영의정의 답은 이랬습니다. 버티는 낌새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언제 나갈지는 알 수 없으니 지극히 근심스럽다.
삼 년
1887년 4월 17일, 나라의 최고 회의기구인 의정부가 아룁니다.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인이 이제 철수했다고 하니 사례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보낸 문서에 그 2년의 요약이 남았습니다.
우리나라 거문도를 영국인이 점거하여 쌓인 것이 삼 년이나 되었고, 물러가라 재촉해도 오로지 미루기만 했다. 여러 나라에 나아가 따지고 조정을 구하려 했으나 도리어 일이 커질까 염려하여 차일피일 우선 참았으니, 약한 것을 깎이는 이것이 부끄럽다.
해로 세면 삼 년, 실제로는 2년이었습니다. 부끄럽다는 말을 조선이 직접 적었습니다.
그 자리에 진을 두다
배가 떠나기 전부터 조선은 그 자리에 무엇을 둘지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정월, 정부는 거문도 방비를 챙기지 못한 것이 너무 허술했다며 관리를 내려보냅니다. 3월에는 섬의 한 마을이 군대 주둔지로 알맞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이런 결론이 붙습니다. 이 섬은 바다 길목의 요충이니 진을 설치하고 장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그해 12월에 지휘관이 임명됐고, 이듬해에는 이웃 세 섬이 이 부대에 딸려 붙었습니다.
허락 없이 들어온 군대는 2년을 머물다 나갔습니다. 조선이 할 수 있었던 건 다른 나라들에 알리는 것, 그리고 빈자리에 부대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흐를지, 기록은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산꼭대기의 깃발,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885년 봄, 임금이 관리 둘을 전라도 앞바다로 내려보냅니다.
먼저 알려 온 것은 이웃이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그해 3월 20일, 청나라에서 편지가 먼저 도착합니다.
아직도 철수하지 않으니,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그해 5월, 임금이 신하들 앞에서 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