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 뜰에 범이 들어왔다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도심에 나타난 짐승 | 태조실록 · 1392년 12월 20일 |
| 근정전 뜰까지 | 태종실록 · 1405년 7월 25일 |
| 마을 사람들이 잡았다 | 태조실록 · 1393년 2월 16일 |
| 나라가 부대를 만들었다 | 세종실록 · 1421년 3월 14일 |
| 다섯 마리를 잡으면 | 세종실록 · 1422년 12월 21일 |
| 활 하나 창 하나 | 세종실록 · 1425년 6월 27일 |
| 잡다 죽은 사람 | 세종실록 · 1423년 7월 9일 |
| 활이 녹아 있었다 | 문종실록 · 1451년 6월 21일 |
| 사칭한 자들 | 태종실록 · 1416년 10월 27일 |
| 사람을 다치지 않고 | 태종실록 · 1405년 5월 2일 |
도심에 나타난 짐승

도심에 짐승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열하루 만에 잡았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그 짐승이 범이었습니다. 나라를 세운 그해 섣달, 범이 성 안에 들어왔습니다. 흥국리에 사는 사람이 활로 쏘아 죽였다고 실록은 적었습니다. 관군이 아니라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근정전 뜰까지

그런데 열세 해 뒤, 실록에 이런 한 줄이 적힙니다. 밤에 범이 한양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입니다. 임금이 신하들을 만나고 큰 의식을 치르는 곳입니다. 그 앞마당까지 범이 들어온 것입니다. 실록은 딱 한 줄만 적고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잡았다

초기 기록을 보면 범을 잡는 것은 대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절에 범이 들어왔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잡았습니다. 태조 자신이 범을 쏘아 죽인 기록도 있습니다. 성에 범이 들어와 사람과 물건을 많이 해치자 직접 활을 잡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라가 부대를 만들었다

나라는 범 잡는 일을 전담하는 군사를 따로 두었습니다. 착호갑사, 범을 잡는 갑사라는 뜻입니다. 1421년에 정원을 정하는데 스무 명이었습니다. 전국을 상대로 스무 명입니다. 병조가 정원이 정해지지 않은 자리가 있다며 스무 명으로 못 박아 달라고 청했고, 그대로 정해졌습니다.
다섯 마리를 잡으면

이듬해에는 승진 규정이 생깁니다. 다섯 마리 이상 잡으면 임금을 호위하는 시위갑사의 예에 따라 자리를 올려 준다. 다섯이라는 숫자가 못 박혀 있습니다. 범 다섯 마리를 잡으면 신분이 올라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잡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활 하나 창 하나

뽑는 기준도 손질합니다. 처음에는 말 타고 쏘기와 걸어서 쏘기를 다 보았는데, 병조가 이렇게 아룁니다. 착호갑사는 용감한 자를 뽑아야 하는데 활 솜씨만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사람의 용감함은 참으로 미리 알기 어렵다. 그래서 활과 창 가운데 하나만 합격해도 뽑기로 합니다. 기준을 낮춘 것입니다.
잡다 죽은 사람
1423년 기록에 이름 하나가 남았습니다. 광주 등지에서 범을 잡을 때 다쳐서 죽은 갑사 부사직 신을경. 임금은 그 집에 쌀과 콩 다섯 석을 부의로 주고, 광주 관아가 장사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했습니다. 승진 규정에 적힌 것도 다섯이었고, 죽은 사람 집에 간 것도 다섯 석이었습니다.
활이 녹아 있었다
그런데 1451년, 좌찬성 김종서가 임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예전에 범이 백악에 들어와 군사를 뽑아 잡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군사들이 차고 있던 활이 모두 아교가 풀려 쓸 수 없었습니다. 백악은 지금의 북악산입니다. 도성 바로 뒤입니다. 범을 잡으러 나갔는데 활이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은 관리들이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라고 답했습니다.
사칭한 자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주인기와 공계손이라는 자들이 경상도에 가서 자기들이 착호갑사라고 속였습니다. 도관찰사 이은은 병조에서 온 공문을 확인하지도 않고 군마를 내주었고, 그들은 성주에서 범을 잡았습니다. 일이 알려지자 관찰사는 파직되고 사칭한 자들은 곤장 백 대를 맞았습니다. 범 잡는 일이 그만한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다치지 않고
포상 기록 하나가 눈에 띕니다. 큰 범이 강화 매도 목장에 들어와 나라 말을 상하게 했는데, 강화 부사 이정간이 잡았습니다. 임금이 비단을 내리며 붙인 이유가 이렇습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능히 잡았기 때문이다. 몇 마리를 잡았느냐가 아니라, 사람이 다치지 않았느냐를 적어 두었습니다.
남은 문장
기록을 이어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이 잡았고, 나라가 스무 명을 두었고, 다섯 마리에 승진을 걸었고, 그러다 활이 녹아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 이름을 사칭하는 자까지 나왔습니다.
짐승이 도성에 들어온 일은 그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실록은 놀랐다고 적지 않았습니다. 몇 명을 두었는지, 몇 마리에 무엇을 주었는지, 누가 다쳤는지를 적었습니다. 놀라움은 지나가고 숫자는 남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활 하나 창 하나
뽑는 기준도 손질합니다. 처음에는 말 타고 쏘기와 걸어서 쏘기를 다 보았는데, 병조가 이렇게 아룁니다.
나라가 부대를 만들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21년에 정원을 정하는데 스무 명이었습니다.
잡다 죽은 사람,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423년 기록에 이름 하나가 남았습니다.
출처
태종실록 · 세종실록 · 문종실록을 참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