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다 — 조선의 여가탈입」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이름이 있었다 | 현종실록 · 1663년 5월 22일 · 이경석 |
| 가마를 타고 | 현종실록 · 1663년 5월 22일 · 김좌명 |
| 빌리지 않고 들어간 자 | 현종실록 · 1663년 5월 22일 |
| 칠 년 뒤 | 현종실록 · 1670년 7월 23일 |
| 견디기 어려운 폐단 | 숙종실록 · 1682년 11월 15일 |
| 돌림병이 돌자 | 숙종실록 · 1719년 8월 29일 · 영의정 김창집 |
| 새 임금의 첫 정사 | 영조실록 · 1724년 11월 1일 · 봉조하 최규서 |
| 죽은 사람도 백성이다 | 영조실록 · 1727년 3월 20일 |
| 좌의정도 안 된다 | 영조실록 · 1727년 12월 3일 |
| 여든 해 뒤 | 영조실록 · 1742년 10월 5일 |
이름이 있었다

요즘 집 이야기가 자주 들립니다. 조선에는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일에 이름이 따로 있었습니다.
여가탈입. 여염집, 보통 사람이 사는 집을 빼앗아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1663년, 임금이 뜸을 뜨는 자리에서 원로 대신 이경석이 이 말을 꺼냅니다. 이미 금지시킨 일인데 이름난 사대부들이 예전처럼 마음대로 빼앗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가마를 타고

임금이 되묻습니다. 그런 일을 듣지 못했는가. 김좌명이 사례를 하나 댑니다.
어떤 벼슬아치가 가마를 타고 부인 행세를 하며 어느 평민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대로 눌러앉았다.
가마는 여자가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문이 열렸습니다. 집주인은 제 손으로 문을 열어 준 셈이 되었고, 그 사람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빌리지 않고 들어간 자

임금의 명이 그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집주인이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빼앗아 들어간 자는 한성부가 찾아내 엄히 금하라. 한성부는 서울을 맡아 다스리던 관청입니다.
이경석이 한 마디를 보탰습니다. 이 일은 한성부를 나무랄 일이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니,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도 함께 부르시라고. 단속하는 관청의 힘이 사대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대신이 임금 앞에서 한 것입니다.
칠 년 뒤

칠 년 뒤인 1670년, 영의정 정태화가 같은 폐단을 다시 아룁니다. 더 강하게 막아야 한다는 청이었고, 임금은 조목을 갖추어 올리라고 했습니다.
같은 날 기사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습니다. 사간 이규령이 여염집을 빌려 들어갔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 자리에서 갈렸습니다. 빼앗은 것도 아니고 빌린 것인데, 바른말 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은 버티지 못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폐단

다시 열두 해가 지난 1682년, 이번에는 임금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남의 집 빼앗는 일은 가난한 백성이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라며 한성부에 거듭 단단히 이르라 했습니다.
한 줄짜리 기사입니다. 그런데 이 한 줄이 말해 줍니다. 1663년에 내린 금지령이 1682년까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돌림병이 돌자

1719년, 영의정 김창집이 아룁니다. 금지령이 그토록 엄한데도 돌림병이 크게 번진 지난해와 올해 이를 무릅쓴 사대부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름까지 댔습니다. 군사 업무를 맡던 부서의 관리 이자가 장사꾼과 통역관의 집만 골라 차례로 빼앗았고, 집주인에게 밥까지 내게 하고서 마음에 안 들면 주인을 꾸짖어 원망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자는 파직되었습니다.
새 임금의 첫 정사
1724년, 새 임금이 즉위한 해입니다. 여든 살 원로 최규서가 말합니다. 근래 왕릉의 채소밭을 없앴고 남의 집 빼앗는 일도 엄히 단속했다고 들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백성이 덕을 본 것을 알 수 있다고.
새 임금이 처음 손댄 일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처음 나온 지 이미 예순 해가 지난 뒤였습니다.
죽은 사람도 백성이다
삼 년 뒤, 임금이 명을 내립니다. 즉위 초에 남의 집 빼앗아 들어가는 일을 금한 것은 산 사람을 편히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 죽은 자도 백성이 아니겠는가.
그 무렵 임금에게 올라오는 민원은 열에 여덟아홉이 묏자리 다툼이었습니다. 임금은 남의 산에 억지로 무덤을 쓰는 일도 똑같이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산 사람의 집을 빼앗는 일에 붙였던 이름을, 무덤에까지 그대로 옮겨 붙인 것입니다.
좌의정도 안 된다
그해 겨울, 영의정과 우의정이 함께 청을 올립니다. 좌의정이 병이 났는데 집은 성 밖에 있고 현직 대신은 성을 나갈 수 없으니, 민가를 빌려 몸을 추스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나라가 금지령을 세워 놓고 대신이 아프다고 억지로 허락한다면 성실한 예우가 아니다, 삼정승의 신하라도 일체 허락하지 않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도리에 오히려 무겁지 않겠는가.
여든 해 뒤
1742년, 임금이 서울을 맡은 관청의 실무자들을 불러 묻습니다. 사대부가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일이 요즘 어떠한가. 범한 자가 있으면 권세 있는 집이라도 숨기지 말라.
서울 가운데를 맡은 관원이 답합니다. 빼앗아 들어가는 폐단이 간혹 있습니다. 간혹 있다는 그 대답이 실록에 그대로 적혔습니다.
이경석이 처음 이 말을 꺼낸 지 일흔아홉 해가 지난 뒤였습니다. 그 사이 임금이 넷 바뀌었고 금지령은 여러 번 다시 내려졌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남의 집 대문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름이 있었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1663년, 임금이 뜸을 뜨는 자리에서 원로 대신 이경석이 이 말을 꺼냅니다.
칠 년 뒤,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칠 년 뒤인 1670년, 영의정 정태화가 같은 폐단을 다시 아룁니다.
견디기 어려운 폐단, 숫자로는 어떻게 되나요?
다시 열두 해가 지난 1682년, 이번에는 임금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