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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벨트 7만 3천 가구…오백 년 전엔 그 안 사람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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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된 기록

대목출전
모조리 찾아내 내보내라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8일
백 보에 지나지 않는데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지키는 자가 뜯어 갔다성종실록 · 1488년 7월 9일
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다연산군일기 · 1504년 4월 19일
도성 밖 전체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5일
민가는 모두 헐었습니다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21일

모조리 찾아내 내보내라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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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內居人, 盡搜出

— 그 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찾아내어 내보내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8일*

其內居人, 盡搜出

— 그 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찾아내어 내보내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8일*

집을 못 짓게 묶어 둔 땅을 어디까지 풀 것이냐가 요즘 이야기입니다. 그린벨트 말입니다. 서울은 빼고 경기도에서만 풀어 7만 3천 가구를 짓기로 오늘 정해졌습니다.

땅에 선을 긋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못 하게 하는 일, 오래된 것입니다. 조선에도 있었습니다. 이름은 금표. 들어오지 말라고 세운 푯말입니다.

오백 년 전, 그 선이 도성 밖 전체로 넓어졌습니다.

백 보에 지나지 않는데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禁標不過百步

— 금표가 백 보에 지나지 않는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禁標不過百步

— 금표가 백 보에 지나지 않는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금표는 원래 좁았습니다.

1478년, 강원도 낙산사 둘레에 세운 금표를 두고 말이 오갔습니다. 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금표가 백 보에 지나지 않는데, 바다가 저렇게 넓은데 하필 그 백 보 안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느냐.

백성과 같이 썼습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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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帝王澤梁無禁, 與民共之

— 옛 임금은 물과 산을 막지 않고 백성과 함께 썼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古之帝王澤梁無禁, 與民共之

— 옛 임금은 물과 산을 막지 않고 백성과 함께 썼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그러자 임금의 잘못을 따지던 벼슬, 대사간 안관후가 반대했습니다.

옛 임금은 물도 산도 막지 않고 백성과 같이 썼습니다. 지금 막으면 뒷사람들이 반드시 절 때문에 막았다고 할 것입니다.

백 보를 두고도 이런 말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키는 자가 뜯어 갔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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詐稱犯禁, 奪人財産

— 금령을 범했다고 거짓 칭하여 남의 재산을 빼앗는다

*성종실록 · 1488년 7월 9일*

詐稱犯禁, 奪人財産

— 금령을 범했다고 거짓 칭하여 남의 재산을 빼앗는다

*성종실록 · 1488년 7월 9일*

십 년 뒤에는 다른 문제가 올라옵니다.

1488년, 왕실 사냥터를 맡은 관청이 아뢰었습니다. 경기도 가난한 백성은 오로지 땔나무를 팔아 먹고사는데, 산을 지키는 자들이 금령을 어겼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며 남의 재산을 빼앗는다고요.

선을 지키라고 세운 사람이, 그 선으로 돈을 뜯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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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此實不知而言之也

— 이는 실로 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다

*연산군일기 · 1504년 4월 19일*

此實不知而言之也

— 이는 실로 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다

*연산군일기 · 1504년 4월 19일*

그리고 1504년.

임금이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의 집들을 헐라고 합니다.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집을 헐면 백성의 원망이 클 것입니다.

임금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것은 실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도성 밖 전체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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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自弘濟院, 東至多野院, 皆定禁限

— 서쪽 홍제원부터 동쪽 다야원까지 모두 금한으로 정하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5일*

西自弘濟院, 東至多野院, 皆定禁限

— 서쪽 홍제원부터 동쪽 다야원까지 모두 금한으로 정하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15일*

석 달 뒤, 선이 넓어집니다.

서쪽 끝 홍제원부터 동쪽 끝 다야원까지, 도성을 둘러싼 바깥을 통째로 묶고 나무 울타리를 세워 아무도 올라가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라.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울타리를 그렇게 다 세울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금표를 세우고 어기면 받을 벌을 함께 적어 늘어놓으면, 누가 감히 들어가겠습니까.

민가는 모두 헐었습니다

弘濟院等處閻閭, 皆已撤去

— 홍제원 등지의 민가는 이미 모두 헐어 냈습니다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21일*

弘濟院等處閻閭, 皆已撤去

— 홍제원 등지의 민가는 이미 모두 헐어 냈습니다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21일*

사흘 뒤 명령이 내려옵니다. 장의문 밖에 이미 금표를 세웠으니, 그 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찾아내 홍제원 밖으로 내보내라.

서울을 다스리던 관청의 차관이 직접 나가 철거를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아뢰었습니다.

홍제원 일대의 민가는 이미 모두 헐었습니다.

곡식값 3분의 1

其價量給三分之一

— 그 값을 헤아려 3분의 1을 주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21일*

其價量給三分之一

— 그 값을 헤아려 3분의 1을 주라

*연산군일기 · 1504년 7월 21일*

그런데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금표 안에 밭이 있었고, 곡식이 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관리는 주인이 몰래 벨까 걱정된다고 아뢰었습니다.

임금의 처분은 이랬습니다. 곡식값은 3분의 1만 헤아려 주고, 곡식은 익거든 나라가 거두라. 다른 사람은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

그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與民共之

— 백성과 함께 쓴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與民共之

— 백성과 함께 쓴다

*성종실록 · 1478년 7월 23일*

26년 전에 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옛 임금은 물도 산도 막지 않고 백성과 같이 썼다고요.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6년 뒤, 선은 도성 밖 전체로 넓어졌습니다.

선은 종이 위에 그었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집을 헐고 손에 쥔 것은 곡식값의 3분의 1이었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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