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녀 기준 셋에서 둘로…조선은 노비가 낳아도 쌀 1,400kg을 줬다
근거가 된 기록
| 대목 | 출전 |
|---|---|
| 나라가 아이를 세다 |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
| 부르는 이름이 바뀐다 | 승정원일기 · 1655년 8월 3일 · 1674년 12월 3일 |
셋에서 둘로

다자녀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셋이어야 다자녀였습니다. 올해부터는 둘부터입니다.
주택 특별공급이 먼저 바뀌었습니다. 공공분양도 민간분양도, 세 자녀 이상이던 신청 자격이 두 자녀로 내려왔습니다. 공공임대는 두 자녀 가구의 배점이 올라갔고, 세금과 자동차 혜택도 둘부터 붙습니다.
기준선이 핵심이다

하반기부터는 고속도로 통행료도 깎아 줍니다. 주말과 공휴일에 10퍼센트, 미성년 자녀가 셋이면 20퍼센트입니다.
기준 하나를 낮추면 받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액수가 아니라 그 기준선입니다.
왜 지금인가

배경에는 숫자가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가 십사만 명을 넘었습니다. 지난해보다 15.4% 늘었습니다. 늘어난 수도 비율도 통계를 만든 뒤로 가장 큽니다. 2년 내리 오르는 중이고, 합계출산율은 7년 만에 영 점 구 명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몇 명부터 다자녀인가」는, 오래전에도 정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아이를 세다

一産三男
— 한 번에 아들 셋을 낳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一産三男
— 한 번에 아들 셋을 낳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조선왕조실록에는 1404년부터 1693년까지, 세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기사가 아흔 번이 넘게 나옵니다.
지방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감사가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 종이가 도성까지 올라가 예조에서 의논되고, 임금이 결재했습니다.
쌀 1,400킬로그램

一乳三男者, 贈米十石
—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은 자에게는 쌀 열 섬을 준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一乳三男者, 贈米十石
—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은 자에게는 쌀 열 섬을 준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정해진 몫이 있었습니다. 쌀과 콩을 합쳐 천사백 킬로그램이 넘었으니, 한 집이 몇 해를 먹을 양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다 살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규정은 법전에 없습니다. 오직 「전례대로」라는 말로만 굴러갔습니다.
둘이 죽었다

無舊例, 不可賜
— 옛 전례가 없으니 줄 수 없습니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無舊例, 不可賜
— 옛 전례가 없으니 줄 수 없습니다
*세종실록 · 1431년 7월 5일*
1431년, 초계군의 노비 약비가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둘이 죽었습니다.
승정원이 아뢰었습니다. 「둘이 죽고 하나만 살았다면, 줄 전례가 없습니다.」
세종이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두 아들을 잃었으나, 쌀을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신하 안숭선이 다시 아뢰었습니다. 「옛 전례가 없으니 줄 수 없습니다.」
예조가 답을 냈습니다. 「반으로 줄여 주소서.」
아이 둘을 잃은 노비에게, 나라가 칠백 킬로그램을 보냈습니다.
성이 없는 이름들
받은 사람 가운데 넷에 하나 가까이가 노비였습니다.
승가, 고초, 단지, 돌비, 분이, 늣언. 기록에 남은 이름들입니다. 성이 없습니다.
딸 셋을 낳아도 줬습니다. 1646년 고성에서는 임금이 「넉넉히 쌀과 고기를 주라」고 했습니다.
부르는 이름이 바뀐다
依例賜米 → 事係變異事
— 전례대로 쌀을 주라 → 일이 변괴에 속함
*승정원일기 · 1655년 8월 3일 · 1674년 12월 3일*
依例賜米 → 事係變異事
— 전례대로 쌀을 주라 → 일이 변괴에 속함
*승정원일기 · 1655년 8월 3일 · 1674년 12월 3일*
그런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같은 일을 적는 말이 스무 해 만에 달라집니다.
1655년에는 이렇게 적혔습니다. 「전례대로 쌀을 주라.」
9년 뒤에는 「이상한 일에 속함」이 되었습니다. 다시 10년 뒤에는 「변괴에 속함」이라고 적혔습니다.
같은 무렵 실록에서는, 세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기사가 전염병 사망자 수 옆에 나란히 실립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1693년을 끝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엇이 먼저 바뀌었나
조선이 왜 쌀을 보냈는지는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사람이 곧 나라의 힘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비의 아이도 셈에 넣었습니다.
그 셈이 흔들리자, 아이가 태어난 일이 갑자기 불길해진 것이 아닙니다. 줄 것이 없어지자 부르는 이름이 먼저 바뀐 것이라고 저는 읽습니다.
기준을 낮춘다는 것은 줄 사람을 늘린다는 뜻입니다. 조선의 기록에 기준을 낮춘 일은 없습니다.
기록한국사 였습니다.
출처
세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을 참고했습니다.


